이기행 작가의 자연탐방 [천당 아래 천안 불당]
소나무 아래 도원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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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5-09-23 19:57본문
출장이 잦아지면서 낯선 도시를 찾는 즐거움이 내 일상에 스며들었다. 새로운 도시에서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를 찾지만, 아무래도 자투리 시간에 잠깐 들릴 수 있는 것이라 시‧군청 주변이나 IC 근처에 그 도시만의 향과 색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이제는 새로운 곳에 가게 될 때는 그 지역 시‧군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며 어디를 걸어야 그 지역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일도 자연스러워졌다.
그런데 의외로 천안만큼은 달랐다. 수없이 스쳐 지나 다녔지만, 정작 머문 적은 드물었다. 성남에서 가까운 거리라 언제든지 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학창 시절 이미 여러 번 찾았던 독립기념관과 유관순 열사 생가, 그리고 어느 휴게소나 있는 천안호두과자…. 그 익숙함이 이미 내 마음속에 천안을 채워버린 탓이었다. 알고 있다고 여겼으나, 실은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는 도시.
천안은 예로부터 삼남대로의 교통 요충지였다. 충청·전라·경상 사람들이 한양을 오가며 반드시 들러야 했던 길목이자, 장터와 역참이 번성했던 곳. 지금도 천안삼거리에는 조선시대 임금들이 행차 때 머물던 영남루가 남아 있다. 천안이라는 지명도 태종이 이곳을 지날 때 마을이 평화롭다고 하여 ‘하늘이 편안하다’라는 뜻으로 붙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붐벼도 ‘길목’은 잠시 머무는 땅이다. 옛날에는 말을 쉬게 하던 역참이었지만, 지금은 고속철과 고속도로가 쉼 없이 관통한다. 그저 많은 이들이 창밖으로 천안의 도심 풍경을 멀리서 스쳐보며 지나칠 뿐이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친숙하지만 늘 한 발 비껴서 있던 땅, 수없이 지났지만 정작 머물지 못한 곳. 그것이 천안이었다.
이런 내게 천안을 새롭게 보여준 이를 만났다. 어느 늦은 저녁, 기분 좋게 불콰해진 얼굴로 그는 천안시민체육공원을 꼭 보라고 권했다. 의외였다. 천안의 그 많은 명소에서 하필 체육공원이라니.
“멀리서 보면 공원이 골프장 필드 같아요. 한때는 도심 한가운데 비싼 땅에 녹지를 만든다고 비난도 받았지만, 지금은 천안을 대표하는 공원이 됐죠.” 천당 아래 불당이라 부를 만해요.”
이곳 지명이 불당이기에 나는 성남의 분당을 떠올리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성남의 분당도 천당 아래 분당이라 했지요. 지금은 바람이 많이 부는 동네로 더 유명해요.”
“왜요?”
“바람이 분당~”
지인은 웃지 않는다. 오히려 웃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는 대신 진지하게 말한다.
“내일 아침 체육공원을 직접 둘러보세요. 다른 곳보다 다를 거예요”
이튿날, 그의 당부대로 천안시민체육공원을 찾았다. 이른 시간인데도 풋살장에서는 벌써 여러 팀이 경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공원 안쪽으로 들어서자, 전날 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던 넓은 잔디밭이 시야에 가득 펼쳐졌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정성껏 가꾼 잔디는 골프장의 그린처럼 부드러워, 아이들과 마음껏 뛰어놀다 몇 번이고 굴러도 좋을 것 같았다. 발끝으로 전해지는 감촉은 한없이 부드러운 양탄자를 밟는 듯했다.

[천안시민체육공원 널따란 잔디밭]
도심 속 녹지공원의 가치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열섬 현상을 완화하고 미세먼지를 잡아주며, 사람의 마음까지 한결 부드럽게 만든다. 아이와 함께 걷는다면 숲을 품은 공원은 그대로 자연을 배우는 교실이 된다.
나는 잔디밭을 천천히 걷다 공원 안쪽 숲으로 발길을 옮겼다. 입구에서 신갈나무와 졸참나무가 반겼고, 여물어 가는 도토리들이 작은 털모자 같은 껍질을 쓴 채 바람에 흔들렸다. 생강나무와 철쭉, 물오리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차례로 길손을 맞이하며 이어지는 숲은 도시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잊게 했다.
길 가장자리에는 유난히 개암나무가 많이 보였다. 잎끝이 뭉툭하게 잘린 모양은 마치 해류를 따라 부유하다 장애물에 부딪혀 죽는다는 개복치를 닮았다. 예전에는 도깨비도 놀래킨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친근한 나무였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헤이즐넛이라는 영어 이름이 더 익숙하다. 깨금이란 정다운 이름은 이제 낯설다.

[깨금나무로 불렸던 개암나무. 헤이즐넛]
숲을 벗어나면 다시 잔디밭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야트막한 언덕이 자리한다. 데크계단을 따라 천천히 오르니 작은 산을 오른 듯 숨이 조금 가빠졌다. 정상에 서자, 단정히 다듬어진 소나무들이 고요히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소나무는 예부터 선비의 기품과 충절을 상징해 왔다. 가뭄에도, 서리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강인함. 천안이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불의에 맞선 의로운 인물을 길러낸 땅이라면, 이 소나무는 그 기개를 닮았을 것이다.
그날 우리는 바로 그 소나무 기상 아래에서 뜻을 모았다. 삼국지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의를 맺었던 도원결의처럼, 옳은 길을 함께 걸어가겠다는 우리의 다짐이 그 자리에 고요히 뿌리내렸다.
그날 스쳐 지나가기만 하던 천안이 그날 내게는 머무는 땅이 되었다. 하늘이 편안하다는 이름처럼, 우리의 결의도 이 땅의 소나무처럼 오래도록 푸르고 굳세게 서 있으리라.

[천안시민체육공원 둔덕 위 늘 푸른 소나무]
이기행 작가의 著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와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성 南쪽에 사는 나무)’이 기재된 원고 내용을 바탕으로 자연과 그 속에 얽혀진 우리네 삶을 이야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