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행 작가의 자연탐방 [나의 살던 고향을 지키던 나무]
단대공원 정상 누릅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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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5-07-10 21:50본문
단대동에서 태어나 그곳에 살았을 적, 창곡중학교로 등교하려면 단대공원 높은 언덕을 올라야 했다. 공원 안 산책로지만, 사실 가파른 산길로 비탈면에 수없이 많은 계단이 있었다. 당시 기억으로는 매일 아침 등굣길이 등산로를 오르는 느낌이었다. 길을 다 오르면 정상에서 키 큰 나무에 늘 등을 기대고 가쁜 숨을 고르곤 했다.
언덕 위 나무를 기점으로 길은 줄곧 내리막이라 그 나무를 반환 깃발로 삼고 계단을 쉼 없이 올랐었다. 당시 야산에는 다른 나무들도 있었지만, 가시 돋친 아까시나무거나 아니면 송진이 밖으로 새어 나온 리기다소나무였다. 그 나무만 늠름하게 서 있었다.

[수정구 단대공원 정상의 느릅나무]
평소 전혀 떠오르지도 않았던 어린 시절 기억은 수십 년 후 다시 그 나무를 마주치고서야 떠올랐다. 그리고 그 나무가 느릅나무임을 뒤늦게 알았다. 느릅나무 아래에 새로 정자도 생겼다. 나무가 높고 수형이 아름다우며 가지마다 잎사귀도 풍성하니 마을의 정자나무로 삼을 만도 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 아닌 주택만 들어찬 논골이었다. 복숭아꽃이나 살구꽃, 아기 진달래는 볼 수 없었던 그저 주택들로 닥지닥지 붙은 동네였다. 살면서 누구에게나 고향에 대한 향수는 아련하게 남아있게 마련이다. 시골집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항상 어느 아름드리나무 밑에서 동무들 웃음소리와 함께 들린다.
하지만, 내가 살던 고향은 나무가 울긋불긋 꽃 대궐을 차려준다거나 하지 않았다. 단지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를 배회하던 비둘기가 쉬어갈 곳을 찾아 여기까지 날아와 동네를 한 바퀴 휘돌 뿐이었다.
어쩌면 이곳도 내가 태어나기 전 이곳은 나무로 빽빽한 산이었겠지만, 도시가 생기면서 나무는 베어지고 새들은 보금자리를 잃었다.
나무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는 말은 고향이란 정서에 대한 커다란 결핍이다. 내게도 고향이 있다는 그런 절박한 심정으로 유년의 기억을 쥐어짜듯 더듬어 찾은 나무가 바로 이 느릅나무다.
느릅나무라는 이름은 밤중에 침대에 아이들을 눕히고 재우기 전 읽어주던 전래동화에서 먼저 알았다. 바로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다. 바보온달이 산속으로 지게를 지고 가고, 평강공주가 온달을 찾아 집에 왔을 때 온달의 어머니는 평강공자에게 말했다.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해 뒷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갔습니다. 이미 오래됐지만,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가난한 온달이 늙은 어머니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산에 오른 이유는 바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내기 위해서였다. 느릅나무 껍질은 예로부터 가난한 백성에게는 배고픔을 달래주던 구황식물이었다.
느릅나무 껍질은 벗겨내면 부드러운 속껍질이 나오는데 찧으면 콧물처럼 끈적끈적하고 말랑말랑해진다. 이것을 먹으면 제법 요깃거리가 되어 백성들은 흉년에 대비하여 평소 느릅나무 껍질을 보관해두었다. 느릅나무는 껍질뿐만 아니라 어린잎도 먹을 수 있어 봄철에 나물로 먹거나 곡식 가루와 섞어 떡을 쪄먹기도 했다.
느릅나무가 비단 배고픔만 채워주는 것만은 아니다. 말린 나무껍질은 비염과 천식을 치료하는 한약재로도 쓰였다. 그래서 종종 느릅나무를 코나무로 부른다. 염증에도 약효가 있어서 느릅나무 껍질로 염증이나 고름이 날 때 상처를 치료하는 약으로 사용했다. 게다가 느릅나무는 빠르게 생장하면서도 재질이 견고해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도 목재로 사용했다.

[엽전 모양의 참느릅나무 열매 (단대천과 탄천 합류부)]
요즘은 느릅나무를 탄천에서 자주 보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참느릅나무다. 느릅나무가 봄에 꽃 피고 열매를 맺는다고 하면, 참느릅나무는 가을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참느릅나무 열매는 작지만, 추운 겨울에도 살아남을 만큼 튼실하다. 나뭇가지를 뒤덮을 정도로 잔뜩 열린 종자는 바람이 불면 사방으로 흩어져 싹을 틔운다. 그래서 참느릅나무를 느릅나무보다 더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야무진 특성 때문에 느릅나무를 Japanese elm이라고 부른다면, 참느릅나무는 Korean autumn elm이라 부른다.
느릅나무와 참느릅나무의 구분은 늦가을에 확연히 두드러진다. 봄에 열매를 맺는 느릅나무에 비해 가을에 열매를 맺는 참느릅나무는 늦가을 나뭇가지에 열매가 남아있다. 그 덕에 겨울을 나는 텃새들이 참느릅나무를 자주 찾아든다. 또한, 느릅나무 껍질은 암갈색으로 세로로 갈라졌고, 참느릅나무 껍질은 사방 갈라지며 너덜너덜하다.
느릅나무의 어원은 늠름한 수형을 볼 때 늠름나무에서 올 법하다. 더구나 느릅나무 꽃말은 늠름과 비슷한 위엄이다. 하지만, 나무 이름은 나무껍질을 물에 담그면 흐물흐물하여 늘어지는 모습을 표현하는 ‘느름하다’에서 왔다.
어느 날, 다시 느릅나무 그늘을 찾아 정자에서 앉았다. 책 한 권도 갖고 왔다. 내 어린 시절 함께 하던 나무와 상봉하며 한가한 시간을 보게 되니 이게 진짜 휴식이다. 휴식(休息)의 어원이 무엇인가! 사람(人)과 나무(木)가 만나 휴(休)를 이루며 숨 쉬는 것이 아닌가!
이제 네가 있었음을 알아보는구나.
이기행 작가의 著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와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성 南쪽에 사는 나무)’이 기재된 원고 내용을 바탕으로 자연과 그 속에 얽혀진 우리네 삶을 이야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