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행 작가의 자연탐방 [박쥐동굴에 박쥐나무가 자라요]
청계산 망경대 동굴 박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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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5-07-08 09:17본문
청계산 울창한 산림에는 많은 수종이 있고, 숲길 언저리에는 다양한 나무와 풀들이 자란다. 계곡물이 맑고 맑아 물이 푸르게 보일 정도라는 청계산 최고봉은 망경대. 날이 맑으면 개성도 볼 수 있어 고려말 유신들은 이 산에 올라 망국을 한탄하며 눈물을 짓곤 했다. 망경대는 거친 바위 능선 최고봉에 있어서 그 아래는 낭떠러지다. 그 벼랑 바로 아래 암반 틈에는 생각지도 못한 한 동굴이 있다.

[망경대와 석기봉 능선 ]
숲이 울창하고 산이 깊기로 유명한 청계산에도 절벽 아래 은밀하게 자리 잡은 동굴은 최고의 은신처였다. 고려말 조견 선생이 은신하였고, 조선 연산군 때는 폭정을 피해 정여창 선생이 의금부 군졸의 눈을 피해 이 굴속에 은신했다. 동굴에는 특이한 이름이 있다.
마왕굴. 고려가 멸망하자 맥이라는 괴물들이 울면서 떼를 지어 이 굴로 들어갔다고 하여 맥굴로 불렀다. 이후 음운이 변해 막굴-망굴-마왕굴로 변했다. 마왕굴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로는 예전 이곳 산 정상에 망루가 있어서 망루 아래 동굴이란 뜻으로 망굴이라 부르다가 마왕굴로 변했다고 한다.
청계산에 마왕굴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마왕이 낮에는 동굴에 숨어 있고 밤에는 박쥐처럼 날개를 활짝 펼쳐 하늘을 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동굴은 박쥐가 많이 살아 사람들이 박쥐 동굴이라 불렀다. 그리고 동굴 앞 깊은 산골짜기는 박쥐골이라 했다.
청계산은 자연의 생태와 사람의 문화가 데칼코마니처럼 겹친다. 우연 같지만, 상징하는 바가 서로 맞닿고 있어 해석하기에 따라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나온다. 피울음으로 넘은 혈읍재에 피나무가 핏자국 따라 점점이 있고, 천주교 성지에 십자가 나무라는 산딸나무가 자생하고 있으며, 망경대 산봉우리에는 신선나무라는 뽕나무가 산 아래 상전벽해로 변해버린 도시를 내려다본다.
게다가 망경대와 마주하는 망경암은 어떠한가! 청계산의 망경대는 멸망한 고려의 수도 개경을 바라보고, 영장산의 망경암은 개국한 조선의 수도 한양을 바라본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뜻은 천지 차이다. 어쩌면 나라가 멸망해야 새로운 나라가 생기는 법이니, 뜻이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없겠다. 알파와 오메가가 근본적으로 하나라면, 망경암은 조선의 알파이며 망경대는 고려의 오메가인 셈이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절묘하게 어우러져 혹시 우연을 빙자한 어떤 필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마왕굴로 올라갔다. 마왕굴은 망경대와 석기봉 사이에 있다. 망경대에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어서 석기봉에서 바위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내려가야 한다. 햇살을 받으면 금빛으로 빛난다는 금정수를 지나 큰 바위 아래 된비알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바위가 갈라진 틈으로 커다란 동굴을 보게 되었다. 박쥐 동굴이었다.
굴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보니 사람 하나 몸을 숨길만 했다. 산을 오르느라 피곤했는지 동굴 안 가파른 바위에 기대어 산바람을 맞았다. 잠시 쉬고 있자니, 굴 밖으로 박쥐가 햇빛을 받아 하늘거렸다. 낮에 웬 박쥐가 날아다니나 싶었다. 그런데 한두 마리가 아니다. 여러 마리가 초록빛으로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박쥐를 닮은 나뭇잎을 가졌다는 박쥐나무. 그 나무가 박쥐 동굴 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 이건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박쥐동굴 앞 박쥐나무]
햇빛을 받은 얇은 나뭇잎 잎맥이 실핏줄처럼 언뜻 비친다. 끝에 3~5개 뿔처럼 뾰족한 잎 모양은 흡사 박쥐가 날개를 펼친 것 같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거리니, 마치 박쥐가 나무를 피해 이리저리 날갯짓하는 것처럼 보인다.
박쥐나무의 잎은 박쥐 날개와 닮아 박쥐나무다. 박쥐나무는 키가 작다. 크게 자라도 산속에서는 3m 내외다. 숲속에서 키 작은 나무로 살아가기에 햇빛을 잘 받을 수 있도록 잎은 넓다. 키 큰 나무 아래 그늘에 있다 보니 음지에서도 잘 자라며 추위에 견디는 힘도 강하다. 박쥐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온대지방에서 자라왔고 옛적부터 어린잎은 나물로 무쳐 먹기도 했다.
더운 어느여름날 마왕굴 앞 박쥐나무를 찾아갔다. 어느새 박쥐 날개를 닮은 잎 아래 하얀 꽃이 드문드문 피어났다. 잎 아래 숨은 꽃잎은 하얀색으로 6장이며, 모두 뒤집혀 돌돌 말려있다.
쪼그려 앉아 보니, 수줍은 듯 아래를 향해 고개를 푹 숙인다. 그 모습이 또 영락없이 거꾸로 매달린 박쥐 모양이다. 보면 볼수록 은근히 어여쁘다.
박쥐는 날 수 있게 진화한 유일한 포유동물이다. 대부분 벌레를 먹지만, 열매나 꽃가루와 꽃을 먹기도 한다는데, 청계산 마왕굴에 사는 박쥐는 박쥐나무 어여쁜 꽃의 꿀을 빨아 먹고살 것 같다.
박쥐는 동굴이나 바위틈 같은 외딴곳에 잠자리를 마련하고, 보통 수십 년 이상 오래 산다. 그래서 서양에서 박쥐는 뱀파이어처럼 영생을 상징하고, 동양에서는 불로장수를 상징한다. 다만, 동양에서 박쥐 복(蝠) 자가 복(福) 자와 소리나 글자 모양이 비슷해 행복을 상징한다. 그래서 예전부터 공예품이나 노리개 무늬에 박쥐 문양이 들어가 복이 깃들기를 소원했다.
박쥐나무 꽃말은 부귀. 어쩜 꽃말까지 복을 상징하는 박쥐와 같을 수 있는가 싶다. 꽃말이 서양 문화에서 유래했을 터인데…
![[포맷변환]20250708[박쥐나무 잎과 꽃.jpg](http://www.powermedia.co.kr/data/editor/2507/20250708091403_wmnroiyf.jpg)
[박쥐나무잎과 꽃]
이기행 작가의 著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와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성 南쪽에 사는 나무)’이 기재된 원고 내용을 바탕으로 자연과 그 속에 얽혀진 우리네 삶을 이야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