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행 작가의 자연탐방 [뼈가 드러난 골짜기에 무성한 물오리나무]
불곡산 기슭 물오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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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5-06-17 13:54본문
산신령이라 부르는 호랑이가 사람을 종종 물어갈 정도로 우리나라 산은 깊고 숲은 울창했다. 조선 후기 인구가 급증하고 온돌을 쓰는 집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산에서 나무는 장작과 땔감으로 점점 더 많이 베어졌다. 나무가 자라는 속도보다 잘라내는 속도가 더 빨랐기에 산림은 금세 훼손되었고, 인가 주변의 산은 민둥산이 돼버렸다. 그나마 남아있던 백두산과 설악산 일대 울창한 천연림마저 일제강점기 산림자원 수탈로 우리나라 산은 김동인의 소설 제목처럼 말 그대로 ‘붉은 산’이었다. 해방 후 그나마 남아있던 수목들도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모두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다.
분당구 소재 불곡산도 중공군과 UN군이 사활을 걸고 격전을 치렀던 곳이다. 당시 수많은 포격전으로 산에는 나무 한 그루조차 남아나질 못했다.
산은 갈비뼈가 드러나 앙상한 모습으로 깊은 골짜기와 산줄기가 주름진 채 드러났다. 비만 오면 붉은 토사가 피 마냥 생채기에서 흘러내렸다. 풍수지리에서 자연의 산천은 사람 몸과 같다고 한다. 땅속 암반은 몸을 지탱하는 뼈요, 지표의 흙은 피부고 지하수는 피, 초목은 털로 비유한다. 초목이 자라지 않고 지표 흙이 유실된 산은 말 그대로 뼈가 드러난 육신이다. 아름다운 금강산이 여름에 봉래산, 가을에 풍악산이라 불려도 겨울철 녹음이 지면 일만 이천 바위 봉우리가 뼈처럼 앙상하게 보여 개골산이라고 부른다. 불곡산 골짜기 안쪽에 자리한 절 이름도 산줄기를 뼈로 봐서 뼈 안에 있다고 골안사라 부른다.
경제성장 시기, 나무 땔감 대신 화석연료를 사용하고 대규모 조림이 시행되면서 황폐된 산지는 점차 푸르게 변했다. 녹화사업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잦은 산사태와 토사 붕괴를 막아야 했다. 콘크리트로 사방댐을 계곡에 만들고, 식물로 피복하여 토사 침식을 방지했다.
![20250617[성남시 산림의 과거와 현재 (임목축적 대한민국 평균)].jpg](http://www.powermedia.co.kr/data/editor/2506/20250617135004_mdfruktx.jpg)
[우리나라 산림의 과거와 현재 (출처 국립산림과학원)]
산림 복구용으로는 특히 오리나무를 많이 심었다. 오리나무는 예전에 가지를 잘게 잘라 논밭에 비료 대신 뿌려줘 비료목이라 부를 정도로 땅을 비옥하게 하는 나무였다. 오리나무에는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 흙의 침식을 막아주어 널리 심었다. 오리나무 종류 중 아예 사방공사를 위해 심어진 나무라서 사방오리나무가 있다. 다만, 사방오리나무는 일본에서 들여온 수종이라 따뜻한 남부지방에 주로 심었고 중부지방에는 물오리나무를 심었다. 사방오리나무를 일본에서는 야사부시라고 부르는데, 작은 솔방울 모양의 열매가 사나운 야차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불곡산도 전쟁으로 모든 나무가 불에 타버린 후 녹화사업으로 물오리나무를 심었다. 물오리나무는 다른 콩과 식물처럼 나무뿌리에 뿌리혹박테리아를 가지고 있어, 식물 생장에 필요한 질소를 공기 중에서 만들어 토양에 공급한다. 척박한 땅을 비옥하게 하고, 그 덕분에 우리 고유의 나무들이 다시 산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지력을 되찾은 산에는 더 다양한 나무들이 왕성하게 성장하며 숲을 차지하고 물오리나무는 차츰 경쟁에 밀려났다.
원래 사방용으로 촘촘하게 심었기 때문에 물오리나무가 서로 부대끼며 자라느라 크게 성장하지 못하지만, 유독 불곡산에는 계곡마다 한 아름되는 물오리나무가 가득하다. 사방사업 후에도 자리를 뺏기지 않고 크게 자라난 물오리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다. 원래 불곡산 자락의 구미동에는 탄천 일대에 방풍림으로 오리나무를 많이 심어서 오리뜰이라고도 불렀다.
![20250617[물오리나무 열매].jpg](http://www.powermedia.co.kr/data/editor/2506/20250617135112_xgpsucip.jpg)
[물오리나무 잎과 열매. 일본에서는 이 열매를 야차 귀신을 뜻하는 야부시라 부른다.]
물오리나무를 자세히 보면 잎은 둥글고 넓은 달걀형으로 가장자리에는 작은 톱니가 뾰족하다. 잎이 좁은 사방오리나무와 구분된다. 오리나무는 생육 속도가 빠르고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 길을 걷다 보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길을 걷다가 종종 보게 되는 오리나무를 이정표로 삼았으며 오리(五里)마다 만난다고 하여 오리나무라고 불렀다. 하지만, 비료나 목기 등 쓰임새가 워낙 많았던 나무인지라 지금은 길에서나 산에서 오리는커녕 백 리를 걸어도 볼 수 없는 나무가 되었다. 대신 사방용으로 심은 물오리나무는 많이 자란다. 작은 솔방울 같은 열매가 특이해 금방 눈에 띈다.
민요 ‘나무타령’에 ‘십리 절반 오리나무’라는 가사가 있다. 흔하다는 오리나무가 2km 남짓 드문드문 있다는 것이 의아하다. ‘훈몽자회’를 보면 오리나무는 ‘올이 남기’로 기록되어 있다. 즉 얼굴에 쓰는 나무라는 뜻이다. 오리나무는 재질이 물러 하회탈처럼 탈을 만드는 나무로 많이 쓰였기 때문에 그리 부른 것이다. 올히남기는 훗날 오리나무로 변했다. 음운변천사를 알지 못하고 그저 소리나는 대로 해석하다 보니 5리로 오역한 것이다. 십리 절반 오리나무보다는 오리가 사는 물가에서 자란다고 오리나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오리나무와 달리 시무나무는 거리에 따른 이정표로 삼을 수 있다. 가시 가득한 시무나무는 단연 눈에 띈다. 흔하지 않아 시무나무는 20리마다 멀찍이 떨어져 있어 이십리목으로 불렀다. 20을 뜻하는 스물에서 스므나무로 부르다가 시무나무가 되었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어느 마을에서 밥을 동냥해서 시무나무 먹으려 했다가 쉰밥이라 먹지도 못하자 ‘이십수하’라는 시를 지었다.
‘二十樹木下三十客 四十村中五十飯’
二十樹(이십수)는 스무나무 즉 시무나무를 말하고, 三十客(삼십객)은 삼십의 우리말 ‘서러운’을 뜻하며, 四十村(사십촌) 뜻은 마흔과 소리가 비슷한 ‘망할’이 된다. 五十飯(오십반)은 오십의 우리말 쉰을 뜻하니 쉰밥을 뜻한다. 즉 시무나무 아래 서럽게도 망할 놈의 집에서 쉰밥을 주었다는 뜻이다. 대단한 천재가 아닌가!
이기행 작가의 著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와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성 南쪽에 사는 나무)’이 기재된 원고 내용을 바탕으로 자연과 그 속에 얽혀진 우리네 삶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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