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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행 작가의 자연탐방 [봉황기가 다시 오를 때]

봉황이 사는 검단산 벽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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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5-06-05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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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 대통령 당선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대통령실 앞에 봉황기가 모처럼 올랐다. 봉황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부터 대통령의 권위와 위상을 상징하였다. 봉황은 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새이며, 봉황의 커다란 날개는 모두를 아우르는 통합의 모습도 담겨 있다.


봉황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새로 용과 더불어 기린, 거북과 함께 신비로운 영물로 여겼다. 봉황은 조류의 왕으로 깃털은 오색을 띠고 매우 아름다우며, 울음소리 또한 매우 고왔다고 한다. 이런 봉황은 왕이 덕으로 백성을 다스릴 때만 나타나며,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다. 옛 조선에서도 봉황은 상서로운 길조로 여겼으며, 어진 임금이 나라를 다스려 태평성세를 바라는 마음으로 궁궐 곳곳에 봉황의 그림으로 장식했다.

 

봉황은 수컷 ‘봉(鳳)’과 암컷 ‘황(凰)’을 합친 말로 암수 두 마리가 함께 있어야 조화롭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이 점은 조화와 협치, 균형 잡힌 통치를 갈망하는 오늘날까지 봉황이 부디 선정으로 나라를 잘 다스려달라는 국민의 염원을 남아있다.


봉황은 아무 데서나 머물지 않는다. 먹는 것도 절개 있는 대나무 열매만 먹고, 둥지도 오직 벽오동에서만 튼다. 우리 선조들은 봉황을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태평성대를 바라며 봉황이 날아와 쉴 수 있도록 곳곳에 벽오동을 심기도 했다. 그리고 날아와 목을 축이며 쉴 수 있도록 연못도 조성했다. 벽오동을 심은 곳 주변으로 대나무도 심어 열매도 먹을 수 있도록 배려 했다. 지극히 고고하고 귀한 봉황이 벽오동에만 둥지를 트는 이유는 올곧게 자라 나무가 마치 절개 있는 선비처럼 품위를 가졌기 때문이다. 

 

송강 정철 선비도 귀양살이하면서 임금이 다시 자신을 궁으로 부르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기도 했다. 


다락 밖에 벽오동나무 있건만 / 봉황새는 어찌 아니 오는가! 

무심한 한 조각달만이 / 한밤에 홀로 서성이누나

 

20250605[벽오동 ].jpg

[벽오동나무 넓은 잎]

 

벽오동은 오동나무와 전혀 다른 나무다. 물론 오동나무에서 앞 글자 오(梧)는 벽오동나무라는 뜻이고 뒷글자 동(桐)은 오동나무라는 뜻이라서 헛갈릴만하다. 하지만, 벽오동은 나무 분류체계상 벽오동과이고, 오동나무는 현삼과 나무로 서로 다르다. 다만 잎사귀만 널찍하고 크다는 점만 비슷할 뿐이다. 

 

벽오동은 다른 나무처럼 세파에 시달려 겉껍질에 골이 생기지 않는다. 모진 풍파에도 의연하다는 듯 줄기는 매끄럽다. 오동나무 겉껍질이 암갈색으로 거친 세로줄이 있는 것과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벽오동의 앞 글자 ‘벽’은 짙은 청록색을 뜻하는 벽(碧)자다. 청단풍의 청(靑)이 다소 맑은 개울의 이미지라면 벽오동 벽(碧)은 짙푸른 바닥의 깊은 색이다. 정말 상서로운 기운을 내뿜는 나무다.


벽오동은 남한산성과 이어지는 검단산 자락에 여러 그루가 자생한다. 참나무 숲길에서 벽오동 퍼런 줄기를 보면 참으로 신비롭다. 그 푸른 빛은 다른 암회색 나무줄기 속에서 홀로 빛나며,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대봉(大鳳)이 여기서 노닐었구나’ 감탄하여, 그 후로 벽오동을 보러 종종 그 숲길을 다니곤 했다. 

 

어느 날은 벽오동을 보고 숲길 따라 검단산 정상까지 오르게 되었다. 검단산은 남한산성과 마주하여 산성 안 행궁보다 더 높아서 대봉(對峯)이라 불렸다. 이 산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빼앗았다. 그리고 남한산성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에서 산성과 행궁을 향해 커다란 대포를 마구 쏘아댔다. 남한산성이 아무리 난공불락이라 해도 높은 검단산 위에서 대포를 쏘아대니, 조선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청 태종은 의기양양해져 남한산성을 한낮 돌담으로 비웃으며 조선 임금에게 말했다.

“너는 죽기를 원하느냐? 지금처럼 돌 구멍 속에 처박혀 있어라.”


검단산을 내려와서 남한산성 로터리에서 현절사까지 간다. 현절사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절대 항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사당이다. 조선이 항복하고 남한산성을 나올 때, 청나라는 전쟁의 책임을 묻기 위해 여러 신하를 내놓으라고 했다. 전쟁 준비도 없이 명나라에 사대만 하고 청나라와 대적만 했던 척화신들은 정작 패전의 책임 앞에서는 모두 몸을 사렸다. 그들이 숨고 뒤로 물러설 때, 홍익한, 윤집, 오달제 세 선비가 대신 자청하여 청나라로 끌려갔다. 

세 선비는 청나라에서 갖은 회유와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청나라에 굴하지 않았으며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청나라는 조선 선비들의 절개가 높다며 탄복하였으며, 조선도 그들을 삼학사라 부르며 사당을 세우고 충절을 기렸다.

 

20250605[현절사].jpg

[삼학사를 모신 현절사]

 

삶을 초개처럼 내버렸던 조선 선비들에게 있어 아무리 굶주려도 좁쌀을 쪼아 먹지 않는 봉황이야말로 자신의 이상향을 실현하는 새였다. 봉황이 노닌다면 필시 이곳 현절사의 벽오동 주변일 것이다.


이기행 작가의 著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와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성 南쪽에 사는 나무)’이 기재된 원고 내용을 바탕으로 자연과 그 속에 얽혀진 우리네 삶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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