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행 작가의 자연탐방 [서쪽 으슥한 숲의 서어나무]
태봉산 서어나무 군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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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5-08-07 08:39본문
성남시 서쪽에 자리잡은 태봉산은 동원동 부수골에서 운재산과 안산, 응달산과 연결하는 산줄기 중 가장 높은 산이다. 주변으로 판교 대장지구, 남서울CC, 헤리티지, 보바스병원 등이 에워싸고 있다. 하지만, 산길은 한갓져서 홀로 찾을 땐 으슥할 정도다.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수록 숲은 더 깊은 그늘을 만들어간다.
태봉산 북쪽은 해가 가려 그늘만 진다는 응달산이 있다. 서쪽은 산에 돌이 많고 구름이 자주 낀다는 석운동이 있다. 한결같이 쓸쓸하고 적막함을 풍기는 이름이다.
태봉산 서쪽 산허리를 옆으로 휘감는 골짜기도 봄이 올 때까지 눈이 녹지 않는다고 하여 설악골이다. 강원도 설악골에 비할 바에야 못 되겠지만, 왠지 그쪽을 지나갈 때마다 차갑고 음습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 산, 태봉산은 풍수지리적으로 길지(吉地)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임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왕의 탯줄을 묻기도 하여 태장산으로 불렸다. 대장동도 원래 태장리였다가 대장동으로 바뀐 지명이다.
이곳에 탯줄을 묻은 인물은 바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다. 태봉산의 기운 덕이었을까? 병자호란으로 수많은 백성이 죽고 포로로 끌려가도 왕좌만큼은 지켜냈다. 반면,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 강빈이 죽고, 손주까지 읽고도 그는 왕위를 지켰다. 과연 이 땅이 인조에게 길지였을까 아니면 흉지였을까.
한때 대장지구에서 아파트를 분양하던 어떤 회사는 이곳이 태봉산을 등지고 고기천을 앞에 둔 배산임수라며 천혜의 명당이라 홍보했다. 결과적으로 그 회사는 분양에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벌었지만,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그곳이 그 회사에 명당이었는지 아니면 흉당이었는지 결국 법의 판단으로 남았다.
![20250807]대장동 개발당시 응달산(左)과 태봉산(右).jpg](http://www.powermedia.co.kr/data/editor/2508/20250807083539_xfyotkdm.jpg)
[응달산(왼쪽)과 태봉산(오른쪽) (대장동 개발 중]
그런데 태봉산을 오르며 느끼는 으슥한 기운의 정체는 따로 있다. 바로 이곳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서어나무 숲 때문이다. 서어나무는 지리산 같은 깊은 산중에서나 간혹 볼 수 있는 나무다. 보통은 산길을 오래 걸어야 한두 그루 만날 수 있는데, 태봉산에는 수백, 수천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서어나무는 겉껍질이 매끄럽고 회색빛이며, 근육처럼 울퉁불퉁한 줄기를 지닌다. 겉은 단아하지만 속은 강인한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나무. 다른 나무들처럼 조급하게 하늘을 향해 치닫지 않고, 숲의 그늘 아래서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
숲이란 본디 변한다. 지금도 숲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서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땅을 한 뼘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생존 다툼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나무가 있으니 바로 서어나무다. 서어나무는 숲의 “천이”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나는 수종이다.
숲의 “천이”란 황무지가 풀밭으로 변하고, 키 작은 관목림이 된 후 키 큰 나무가 빼곡하게 자라게 되는 과정이다. 먼저 황무지는 햇빛을 좋아하는 소나무가 땅을 독차지한다. 오리나무, 아까시나무, 칡덩굴도 햇빛을 받아 잘 자란다. 차츰 다양한 씨앗이 날아오고 온갖 나무가 자라기 시작한다. 나무 밑은 이제 그늘이 져 햇빛이 닿지 않는다. 그러면 햇빛을 좋아하는 소나무나 아까시나무 씨앗이 더 이상 움트지 못한다. 대신 참나무 도토리나 단풍나무 시과가 그늘에서도 싹을 잘 틔운다. 그중 서어나무 종자는 한 줌 햇살로도 무럭무럭 자라난다.
시간은 서어나무 편이다. 숲이 커질수록 그늘은 더 짙어지고 서어나무만 무럭무럭 자란다. 그리고 마침내 서어나무가 다른 나무를 밀어내고 최후의 승자로 남는다. 오래된 숲에서는 서어나무가 최후까지 살아남아 숲을 지배한다. 이런 숲을 극상림이라 하며, 더 이상 생태계 변화가 없는 완전한 평형이 된다.
서어나무의 가치는 우리나라 제1회 아름다운 마을 숲으로 지정된 숲이 서어나무 숲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남원의 지리산 자락 행정마을은 한여름에도 울창한 서어나무가 둘러싸고 있어 시원하다. 이런 행정마을에도 서어나무는 백여 그루 남짓한데, 태봉산의 서어나무 자생지는 족히 수백 수천 그루가 넘는다.
![20250807]가을 서어나무 숲 (태봉산).jpg](http://www.powermedia.co.kr/data/editor/2508/20250807083551_hfzmesxh.jpg)
[태봉산 서어나무숲]
외국에서 서어나무는 표피가 근육과 같다고 해서 muscle tree라고 부른다. 학명 중 Carpinus는 나무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서어나무가 숲의 천이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숲의 주인임을 보여준다. 또 목질이 짐승의 뿔처럼 단단하고, 잎이 붉은빛을 띤다고 하여 Red-Leaved Hornbeam으로도 부른다.
서어나무는 주로 서쪽에서 자라서 서목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 서목을 우리말로 서나무라고 했다가 부르기 쉬운 서어나무로 되었다. 서쪽은 해가 지는 방향으로 그늘지는 곳이다.
나무에 서란 글자가 붙으면 음지에서도 잘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서목으로 불린 서어나무는 그늘에서 잘 자라난다. 그래서 응달산 기슭 태봉산에 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고, 그래서 숲이 그늘지고 어두우며 음습하기까지 한 이유다.
![[포맷변환]20250807]계절에 따른 서어나무 열매.jpg](http://www.powermedia.co.kr/data/editor/2508/20250807083556_cttmgzpx.jpg)
[계절에 따른 서어나무 열매]
이기행 작가의 著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와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성 南쪽에 사는 나무)’이 기재된 원고 내용을 바탕으로 자연과 그 속에 얽혀진 우리네 삶을 이야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