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행 작가의 자연탐방 [완도군 명사십리와 창해일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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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5-10-17 09:48본문
파도소리가 울음소리를 내는 명사십리
완도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신지면에 길이 3.8km의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길이로 따지면 십리쯤 되는 백사장이다. 모래는 곱고 빛깔은 밝다. 사람들은 이곳을 ‘명사십리(鳴沙十里)’라 부른다. 처음엔 단순히 모래가 깨끗하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여기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명사십리’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쓰는 해변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럼 동해안의 명사십리는 뭐지?’
사실 동해안에 있는 명사십리는 내가 가본 적이 없다. 아니, 갈 수가 없다. 우리가 흔히 긴 해변을 두고 ‘명사십리’라 부르지만, 본래 명사십리는 고유명사다. 함경남도 원산시에 있는 모래사장이 바로 그곳이다. 그곳의 모래는 눈처럼 희고, 해변 길이가 정확히 십리(十里)에 이른다. 진짜 ‘명사십리’는 그곳이다. 남쪽의 해변들이 그 이름을 빌려 쓸 뿐이다.
하지만 완도의 바다는 그 이름을 빌릴 자격이 있다. 해변은 길고 모래는 깨끗하며, 물빛은 투명하다.
그럼에도 왠지 한적하고 쓸쓸하다. 날씨가 맑으면 바다 건너 제주도가 보인다는데, 이곳은 땅끝 해남을 지나 다리를 건너 완도로, 다시 신지도까지 들어와야 닿는 먼 곳이다. 그래서일까. 백사장엔 유럽풍 등대와 야자수 조형물이 들어서 있지만,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 관청의 정성은 느껴지지만, 남도의 고요함엔 어색한 장식일 뿐이다.

[완도 명사십리. 파도 소리가 울음소리 같아 명사십리로 부른다.]
나는 ‘명사십리’란 이름도 관광객을 끌기 위한 작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곳의 ‘명사(鳴沙)’는 ‘밝을 명(明)’이 아니라 ‘울 명(鳴)’ 자를 쓴다. ‘울음소리 나는 모래십리’. 그 이름엔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조선 철종 때, 한 왕족이 억울한 죄로 완도까지 유배를 왔다. 안동 김씨 세도가가 조정을 장악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매일 바닷가에 앉아 손가락으로 시를 쓰듯 모래를 그렸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사람들은 그가 떠난 뒤에도 바닷바람이 불면 모래가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명사십리’, 울음의 해변이라 불렀다.
그 사연을 듣고 보니, 파도소리가 유난히 슬프게 들렸다. 아무리 눈부신 해변이라 해도, 사람이 사라진 자리는 공허하다. 그 적막함은 아름다움보다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파도와 비파의 울음소리
완도에는 유난히 비파나무가 많다. 거리의 가로수, 한옥의 뜰, 공원의 정원마다 비파나무가 자란다. 한겨울인데도 잎은 푸르고, 꽃이 피어 있었다. 완도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따뜻한 땅끝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비파나무는 10월 말에서 12월까지 꽃이 피고, 이듬해 여름 자두처럼 생긴 노란 열매가 열린다. 열매는 달고, 예로부터 약효가 뛰어나 귀한 과일로 여겨졌다. 이름은 열매의 모양이 중국 악기 ‘비파’와 닮아 붙여졌다. 혹은 반대로, 비파라는 악기가 이 열매의 형태를 닮아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예전에는 비파와 거문고를 함께 연주하면 그 소리가 조화를 이루어 ‘금슬(金瑟)’이라 불렀다. 오늘날 우리가 부부 사이를 두고 “금슬이 좋다”고 말하는 것도 그 유래에서 비롯되었다.
문득, 오래전 본 영화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연걸과 임청하가 출연한 중국 무협영화 《동방불패》. 비파소리가 깔린 장면에서 두 인물이 서로 얽히고, 싸우고, 그리워하던 장면이 아직도 잔상처럼 남아 있다. 그 영화의 주제곡이 바로 〈창해일성소(滄海一聲笑)〉, ‘푸른 바다에 한바탕 웃는다’는 뜻의 노래다. 만약 완도 명사십리로 귀양 온 선비가 비파나무 아래에서 이 노래를 들었다면, 그는 울지 않고 바다를 향해 미소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열매가 비파 악기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비파나무]
창해일성소(滄海一聲笑)
푸른 파도에 한바탕 웃는다.
도도한 파도는 해안에 물결을 만들고,
물결 따라 떴다 잠기며 아침을 맞네.
푸른 하늘을 보고 웃으며 어지러운 세상사 모두 잊는다.
이긴 자는 누구이며 진자는 누구인지 새벽하늘은 알까.
강산에 웃음으로 물안개를 맞는다.
파도와 풍랑이 다하고 인생은 늙어가니 세상사 알려고 않네.
맑은 바람에 속세의 찌든 먼지를 모두 털어 버리니,
호걸의 마음에 다시 지는 노을이 머문다.
만물은 웃기를 좋아하고 속세의 영예를 싫어하니,
사나이도 그렇게 어리석고 어리석어 껄껄껄 웃는다.

[영화 동방불패에서 청해일성소를 부르는 장면]
이기행 작가의 著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와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성 南쪽에 사는 나무)’이 기재된 원고 내용을 바탕으로 자연과 그 속에 얽혀진 우리네 삶을 이야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