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행 작가의 자연탐방 [피톤치드 풍부한 잣나무 숲에서]
피톤치드 풍부한 잣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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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5-09-09 18:11본문
영장근린공원의 한 귀퉁이 야산은 대낮에도 늘 어둑어둑하다. 나무들이 병사처럼 도열해 줄 맞춰 자란 잣나무 조림지 때문이다. 묘목 시절 촘촘히 심은 탓에 성목이 된 지금은 자리가 비좁아졌다. 빼곡하게 들어찬 잣나무 중 햇빛을 받지 못한 가지는 말라 죽었고, 그 가지가 나무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 숲은 한층 더 어둡고 음침하다. 바닥에 수북이 쌓인 잣나무 잎은 주변의 소리를 흡수해 숲을 적막하게 만든다. 그 음습한 기운 속에서 잠시 몸이 움츠러드는 듯하다.
잣나무는 본래 북쪽 고산지대에 자생하는 한대성 수종이다. 하지만 산성 주변에는 일부러 잣나무를 심기도 했다. 전쟁 등 비상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고, 때로는 황무지를 조림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우리나라 산하는 푸른 산보다 붉게 드러난 민둥산이 더 많았다. 그러나 나라가 폐허에서 다시 일어서던 시절, ‘한강의 기적’과 더불어 ‘치산녹화의 기적’이 일어났다. 전국적인 나무 심기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잣나무 조림지 (영장근린공원)]
1946년, 해방 이듬해 4월 5일. 조선의 임금이 선농단에서 친히 농사를 시작하던 날에 맞춰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때 가장 많이 심은 나무가 잣나무였다. 잣나무는 내한성과 건조·척박한 땅에서도 버틸 수 있는 강인함을 지녔고, 생장이 빠르며 병충해에도 강했다. 게다가 겨울에도 푸른 숲을 이루어 산지 조림에 최적이었다.
겨울 상록수로는 소나무가 대표적이지만, 잣나무는 소나무재선충병에도 강했다. 소나무가 솔방울만 맺는 반면, 잣나무는 먹을 수 있는 잣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가평에서는 화전민들이 숲을 태워 밭을 일구는 대신 잣나무를 심게 했고, 세월이 흐르자 묘목은 아름드리 잣나무로 자라 수십만 그루의 잣나무 숲이 조성되었다. 지금은 가평의 대표적인 휴양림이 되어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그 순간 생각이 스쳤다. 이 음습한 잣나무 조림지도 가평처럼 가꾼다면 훌륭한 휴양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버림받은 장소가 밝고 건강한 숲으로 변해 아이들에게 물려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햇빛을 가리던 가지와 죽은 가지를 솎아내자 숲속으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바람도 나무 사이로 시원하게 통과했다. 예비군 훈련장이던 참호 자리를 흙으로 메우고 정자를 세웠다. 벤치와 평상도 놓았다. 그러자 숲에서 음습한 기운이 빠져나가고 상쾌한 바람과 밝은 빛이 깃들었다.

[잣나무 조림지 휴양림 조성공사 (영장근린공원)]
잣나무 잎이 두텁게 깔린 길은 푹신하여 걷기 좋고, 주변 소음을 흡수해 숲은 더욱 고요하다. 빽빽한 숲에 홀로 서 있으면 바람 소리가 잎의 흔들림으로 보이고, 햇빛은 마치 잎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잣나무는 특히 피톤치드를 많이 내뿜는다. 해충이나 곰팡이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물질인데, 사람에게는 아토피나 우울증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숲길의 이름을 ‘힐링 숲 산책길’이라 정하고 안내판을 세웠다. 이제 이곳은 단순한 사방사업용 조림지가 아니라, 숲과 사람이 공존하며 치유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었다.

[잣나무 힐링숲 산책길 (창곡동)]
소나무와 잣나무는 겨울에도 푸르다고 하여 충성과 절개의 상징으로 ‘송백’이라 불렸다. 우리는 흔히 소나무를 더 친숙하게 여기지만, 잣나무야말로 한국이 원산지다. 영어 이름도 Korean Pine이다. 게다가 최상급 목재로 불리는 ‘홍송’은 사실 소나무가 아니라 잣나무를 뜻한다. 붉은 소나무는 따로 ‘적송’이라 부른다.
숲길에서 소나무와 잣나무를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소나무는 바늘잎이 두 개씩 한 묶음으로 나고, 잣나무는 다섯 개가 한 묶음이다. 그래서 소나무를 ‘이엽송’, 잣나무를 ‘오엽송’이라 부른다. 리기다소나무는 잎이 세 개씩 난다. 줄기 껍질은 소나무가 잣나무보다 더 거칠고 갈라져 있으며, 멀리서 보면 잣나무는 은빛을 띠고 소나무는 온통 짙은 초록빛이다. 최근 도심에 많이 심는 스트로브잣나무 역시 은빛을 띠어 영어로 White Pine이라 불린다. 공해에 강하고 생장이 빠르며, 수형은 원뿔 모양으로 곧게 자란다. 잣나무보다 껍질이 매끈하고, 탄소 흡수 능력과 피톤치드 발생량도 뛰어나 도심 조경수로 각광받는다.
여유가 생기면 나는 이 잣나무 숲길을 걷는다. 빽빽했던 조림지가 햇살과 바람을 품은 힐링 숲으로 변했듯, 사람의 손길이 닿을 때 숲은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살아난 숲은 다시 사람을 치유한다.
이기행 작가의 著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와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성 南쪽에 사는 나무)’이 기재된 원고 내용을 바탕으로 자연과 그 속에 얽혀진 우리네 삶을 이야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