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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행 작가의 자연탐방 [하늘과 땅의 경계선, 김제 지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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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5-10-02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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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지리 시간에 배운 것 중 하나는 우리나라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국토의 65%가 산지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마을마다 산이 포근하게, 혹은 위압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해도 늘 산등선이 너머에서 떠오르고, 또 산 너머로 저물곤 한다.


산은 우리 삶에 가까이 붙어 있어서 멀리 있는 것은 시야에서 가려 버린다. 그래서 아득히 멀리 있는 풍경은 상상 속에서조차 쉽지 않다. ‘아득하다’, ‘막막하다’는 이미지가 우리 마음속에 선명히 그려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공간의 감각은 곧 시간의 감각과 닮아 있다. 바쁘게 살다 보면 하루, 이틀, 몇 주, 몇 달이 어떻게 다른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누군가 “조만간 보게 될 거야”라고 말했을 때, 그 기다림이 이렇게 길 줄은 몰랐던 것처럼.


나는 아직 지평선을 본 적이 없다. 다만 바닷가에 서서 저 멀리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수평선을 본 경험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평선도 위로는 같은 하늘이겠지만, 아래에는 바다가 아니라 드넓은 땅이 있을 거라 짐작한다. 수평선을 바라볼 때 ‘정말 멀다’, ‘아득하다’는 감각이 밀려오듯, 지평선 또한 광활한 공간과 끝 모를 시간의 무게를 느끼게 해줄 것이다.


‘지평선’이라는 말은 이국적이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나 사막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지,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우리나라에도 지평선이 있다고 한다. 바로 호남평야의 중심, 김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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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평야 [김제시청 자료]]

 

벽골제와 김제평야


마침, 김제시청에 들를 일이 있기에, 그 자투리 시간에 김제 지평선을 보기로 하였다. 다행히 김제시청 인근에 벽골제가 있다. 그전에 김제시는 가본 적이 없지만, 김제 벽골제는 친숙한 이름이다. 어릴 적 국사 시간에 배운 우리나라 삼한시대에 오래된 3대 저수지에 김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천 의림지,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지금까지 머릿속에 남은 것을 보니, 시험에 자주 나왔는지 달달 외웠나 보다. 그런데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다. 뜻도 모른 채 그저 단어 외우기에만 급급했다. 벽골제로 가기 전에 벽골제 이름이 무엇에서 유래하는지 알아봤다. 벼의 고향이라는 뜻의 볏고을에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김제시 로고에도 붉은 태양을 배경으로 지평선과 벼 이삭이 그려져 있으니, 김제가 벼농사의 중심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제평야는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다. 벽골제가 단순한 제방이 아니라 벼의 고을을 지켜낸 물줄기였음을 진작 알았다면, 어린 시절 더 재미있게 배웠을 것이다. 무의미한 암기만 남긴 교육이 얼마나 배움의 즐거움을 빼앗는지 새삼 느낀다.


내친김에 제천의 의림지는 한자로 義林池를 쓰며, 의림은 샘물이 솟아나는 지역을 말한다. 제천이라는 이름도 둑 제(堤)와 내 천(川)을 써서 바로 의림지를 말한다.

밀양의 수산제는 한자로 守山堤로 쓴다. 물 水가 아닌 지킬 守자를 쓴다. 이는 낙동강 지류인 용진강 물 주기가 산으로부터 흘러들어 만들어진 제방을 관리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밀양 이름도 원래 변한의 부족국가였던 미리미동국에서 왔다. '미동'은 순우리말로 물둑 즉 제방이라는 뜻이다. 진작 국사를 이리 배웠으면 얼마나 재미났을까 싶다.


벽골제에서 만난 상징들


김제 벽골제에 당도하니 넓은 주차장이 눈에 띈다. 드넓은 평야를 자랑하더니 주차장도 호남평야를 닮아 초록 잔디가 벼 인양 끝없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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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재로 들어가는 정문]

 

 

벽골제는 사적 제111호로, 길이 3.3km에 이르는 제방이었으나 지금은 2.6km만 남아 있다. 수문 다섯 개 중 두 개가 보존되어 있고, 당시 동원된 인원만 32만 명으로 추정된다. 제방 하나에 담긴 농업과 국가의 힘이 실감난다.

 

인근 농경문화박물관에는 전통 농기구와 농경문화가 전시되어 있다. 야외에는 쌍용 조형물이 마주 보고 있는데, 물을 다스리는 용의 신화와 벽골제를 연결한 상징이다. 쌀농사의 생명줄인 물이 곧 신화적 경외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벽골제 관광지 내 부대시설과 여러 전시관을 둘러보니 전통 담벼락에 커다란 박태기나무가 눈에 띈다.

박태기나무는 꽃이 피기 전, 꽃봉오리가 마치 밥알을 닮아서 ‘밥풀떼기’ ‘밥티기’ 등으로 불리다가 이 단어들이 '박태기나무'가 되었다. 이 나무를 곡창지대 김제에서 보다니 매우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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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찾아간 벽골제의 박태기나무]

 

나는 박태기나무를 보니 슬프다. 주렁주렁 매달린 꽃이 처연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슬프다. 우리 선조는 산악지대에 살다 보니 대대로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래서 웬만한 나무들 이름은 먹고 싶은 밥을 빗대어 이름을 지었다. 큰 나무 위에 핀 하얀 꽃은 하얀 쌀을 닮았다고 이팝나무고, 작은 나뭇가지에 핀 하얀 꽃은 좁쌀을 닮았다고 조팝나무라고 한다.

 

일본인들이 조팝나무를 나무에 하얀 눈꽃이 피었다고 하여 '눈버들'이라 할 때 우리 선조들은 하얀 쌀을 연상했다. 무척 처량한 일이다.


우리나라 곡창지대인 김제, 이 드넓은 평야에서 수확한 쌀로 모두 넉넉하고 배부르게 먹을 터다. 그런데, 누군가 굶주리고 배고파한다는 것은 결국 분배의 문제인가 싶기도 하다.


김제에서 볼일을 마치고 귀경길에 쌀 두 포대를 구해왔다. 쌀 브랜드 이름이 지평선이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오직 한 곳에서 맛과 영양이 살아있는 쌀이라 홍보한다. 

쌀 이름이 좋다. 지평선.


이기행 작가의 著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와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성 南쪽에 사는 나무)’이 기재된 원고 내용을 바탕으로 자연과 그 속에 얽혀진 우리네 삶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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