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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행 작가의 자연탐방 [하늘 높이 자라난 능소화]

능소화 피어난 어느 담장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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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5-07-3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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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닮은 꽃, 능소화

 

능소화를 처음 만난 날

 

짙은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아이가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다리를 번갈아 뻗으며 무언가 흥얼거리던 그 아이는, 마치 기분 좋은 비밀이라도 간직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름이 뭐니?”

“소화.”

“예쁜 이름이구나. 하얀 꽃이라는 뜻이야?”

“아니. 흴 소(素)자가 아니라 하늘 소(霄)자야.”

“…하늘꽃?”

“아니. 하늘보다 예쁜 꽃.”

당돌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 눈빛엔 오히려 맞장구치고 싶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까만 눈동자, 꽃 수술처럼 길게 뻗은 속눈썹이 인상 깊었다.

“그럼 성은?”

“여자.”

또렷하게 빤히 쳐다본다. 마치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기다리는 듯한 장난기 어린 눈빛이다.

“그래? 몰랐어.”

그는 깔깔 웃었다. 맑고 크고 깨끗한, 아이의 웃음보다 더 환한 소리였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성은 능이야.”

“…그럼 능 씨에 소화. 능소화?”

고개를 한번 까딱인 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향했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놀랄 만큼 청명했지만, 왠지 눈이 찌푸려질 만큼 선명했다.

“능소화가 정말 네 이름이야?”

능 씨 성이 있던가? 속으로 생각하며 ‘능소화’라는 꽃 이름을 떠올렸다. 그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며, 왠지 본명을 굳이 되묻고 싶지 않아졌다. ‘소화’.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습작 시절, 원고지 위에 끄적이던 시의 제목도 ‘소화’였다. 경춘선 플랫폼에서 강촌행 열차를 기다리던 밤, 우두커니 서 있던 여인의 이름. 성은 굳이 붙이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던 이름. ‘능’이라는 성씨는 현실에는 없을지라도, 그는 그렇게 불리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20250731[비오는 날 능소화.jpg

[어느 비가 오던 날, 촉촉해진 능소화 꽃잎]

 

비 오는 날의 능소화

 

며칠 후, 교보문고에 들렀다. 서가 앞 한국소설 코너에서 눈길을 끄는 책이 있었다. 『능소화, 400년 전에 부친 편지』. 조두진 작가가 쓴 소설로,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책장을 넘기다 문득, 한 구절이 가슴에 박혔다.

 

“꽃 귀한 여름날 그 크고 붉은 꽃을 보시거든 저인 줄 알고 달려와 주세요.

저는 붉고 큰 꽃이 되어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처음 당신이 우리 집 담 너머에 핀 소화를 보고 저를 알아보셨듯,

이제 제 무덤에 핀 능소화를 보고 저인 줄 알아주세요.”

 

소설의 모티브는 1998년 안동에서 발견된 한 미라와 함께 있던 400년 전의 한글 편지였다. '원이 엄마의 편지'. 이 절절한 연서는 내셔널지오그래픽에도 소개되었다.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가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어서 나를 데려가 주세요.”

 

노래 가사가 겹쳐 떠올랐다. 소리바다에서 음악을 검색해 이어폰을 꽂는다. 흐느적이는 선율, 글루미 선데이는 언제 들어도 우울하다. 400년 전 조선의 여인과, 동유럽의 한 도시에서 절망하던 여인의 울음이 이토록 닮았다는 사실이 먹먹했다. 괜히 들었다 싶었다.

 

20250731[능소.jpg

[하늘 높이 자라나는 능소화]

 

능소화와 담장

 

붉은 벽돌 담벼락을 따라 걷는다. 이제는 보기 드문 적벽돌 집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대신 다세대 건물이 들어선다. 담 아래에는 담쟁이가 파랗게 잎을 펼치며 벽을 기어오른다. 손바닥처럼 흔들리며 담을 타려 하지만, 결국은 담장 아래에 달라붙어 있을 뿐이다.

 

반면, 담장 위로는 능소화가 하늘을 향해 도도하게 뻗어 있다. 꽃은 주황색과 노란빛이 어우러진 붉은색.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난 다섯 장의 꽃잎은 화려하면서도 정갈하다.

 

능소화는 여러 이름을 지녔다. 장마철에 피기에 ‘비꽃’, 꽃잎이 동백처럼 통째로 떨어지기에 ‘처녀꽃’. 담장이나 나무를 타고 오르기에 ‘금등화’라고도 불렸다.

 

능소화는 양반집의 꽃이었다. 능(凌)은 ‘업신여긴다’는 뜻. 하늘을 업신여길 듯 솟구치는 그 기세에, 평민은 감히 그 꽃을 마당에 심을 수 없었다. 만약 능소화를 몰래 심었다가 들키면, 관아에 끌려가 곤장을 맞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양반은 봐도 괜찮지만, 백성이 보면 꽃가루 가시에 눈병이 난다는 말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수록, 사람의 마음이 더 얄궂게 느껴진다. 능소화는 결국 슬픔을 품은 꽃이다. 임금을 기다리다 끝내 죽음을 맞은 궁녀 ‘소화’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잘려나간 기다림의 꽃

 

어느 날, 오랜 시간 나의 길이자 기억이었던 골목에서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매년 여름, 온 담장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던 능소화 수십 그루가 잔인하게 잘려나간 것이다.

 

그 담장은 마을의 자랑이었고, 여름이면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초록 담장의 정체가 콘크리트 방음벽임이 드러나 버렸다.

 

[포맷변환]20250731[능소화 벌채 전·후 담벽 모습.jpg

[능소화가 자라났던 담장과 잘라진 이후 드러난 방음벽]

 

사라진 꽃, 남겨진 말

 

능소화 대신 그 자리에 남천이 심어졌다. 사연은 참소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능소화 꽃가루는 갈고리 모양이라 눈에 들어가면 실명할 수 있다”며 시청에 민원을 넣었고, 높게 자란 능소화는 결국 잘려 나갔다.

 

이런 괴담은 다른 지역에서도 퍼졌고, 학교나 주택 담장에 피어난 능소화는 줄줄이 사라졌다. 그러나 능소화는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봐도 실명을 유발할 구조가 없다. 더구나 능소화는 바람에 꽃가루를 날리는 바람매화가 아니라, 나비와 벌이 꽃가루를 옮기는 충매화다.

 

억울하고, 또 애달팠다. 능소화는 죄가 없었는데, 헛소문 하나에 무참히 잘려나간 것이다.

 

아마 그날 꿈에 나타났던 ‘소화’도 그래서였으리라. 말없이 앉아 있던 그 모습엔 잘려나간 몸의 슬픔과, 그런 운명을 만든 하늘을 향한 짙은 원망이 담겨 있었던 것 같다.

 

능소화의 꽃말은 기다림, 그리움, 그리고 명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기억하고, 그 마음을 지켜가는 것. 말없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던 ‘소화’는, 아무 말이 없어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능히, 능소화였다.


이기행 작가의 著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와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성 南쪽에 사는 나무)’이 기재된 원고 내용을 바탕으로 자연과 그 속에 얽혀진 우리네 삶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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